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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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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4-03-31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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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음력 2월13일, 정조의 최측근인 좌의정 채제공이 파직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채제공이었지만, 정조의 결단은 추상같았다.
발단은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능) 별검 이주석에 대한 어사의 보고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과 그의 동료 이주명의 죄는 심각했다. 특히 두드러진 죄는 우금령(牛禁令·소 도축 금지령)을 어긴 일이었다. 조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 도축을 법으로 금했는데, 그에 더해 한 해 전인 1795년에는 이를 강조한 왕명이 별도로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주석은 능졸들이 영릉 내에서 소를 사적으로 도축하는 것을 허락했으니, 문제가 컸다.
게다가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은 영릉 인근 마을에 사는 과부를 불법으로 결박해서 밤새 숯 보관 창고에 가둔 일도 있었다. 영릉에 갇혔던 과부와 그녀 오빠의 호소로 이 일이 밝혀졌는데, 그들 말에 따르면 이주석은 수절하려는 과부를 강제로 능군(陵軍)인 김강정과 동거하게 만들려고 이러한 일을 벌였다. 물론 여기에 반하는 증언도 있었다. 당시 이 과부는 이미 김강정과 동거 중이었는데, 워낙 김강정이 가난해서 과부가 이를 못 참고 도망쳤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했다. 사안은 후자에 무게가 실렸다. 그러나 영릉 별검이 자기 부하 부탁으로 사사롭게 과부를 때리고 가둔 것은 그 자체로 범죄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주석에게는 더 큰 혐의도 있었다. 만약 이게 혐의를 넘어 사실로 밝혀졌다면, 이주석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이주석이 영릉으로 비구니를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이 일을 적발한 장교는 비구니가 영릉의 재실에 들어오려 해서 바로 능 경계 밖으로 쫓아낸 일은 있지만, 비구니가 춤추고 노래했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이주석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이 사안은 혐의에 그쳤지만, 앞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 그는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이주석과 이주명 두 사람은 신문을 받고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이 둘의 처벌이 너무 가볍다며 다시 신문해야 한다는 계사(啓辭·죄를 논하기 위해 왕에게 올리는 문건)를 올리기 시작했다. 혐의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지만, 당시 이주석의 당색이 남인인 탓도 컸다. 결국 이를 지켜보던 지평 류하원이 사간원과 사헌부를 향해 이주석에 대한 계사를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게 다시 문제가 되었다. 류하원 역시 남인이다 보니, 그의 주장이 같은 당을 비호하는 일로 비쳤기 때문이다.
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역사가는 시시포스의 운명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6조
당파 문제에 유난히 예민했던 정조는 이주석의 죄가 심한데, 그에 대한 계사를 정지해야 한다는 류하원의 말은 터무니없다면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채제공에게 류하원의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물었고, 채제공 역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류하원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류하원을 흑산도에 유배 보냈고, 남인의 영수 채제공도 파직했다(노상추, <노상추일기>).
현대 관점에서 봐도 이주석의 죄는 무겁다. 그러나 그의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남인의 영수라는 이유로 채제공이 지는 것은 쉬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당파는 유학 이념, 즉 도덕적 당위를 기반하여 형성되기에, 같은 당파 내 개인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공동체 전체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개인의 도덕적 일탈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에 당파 수장의 책임이었다. 물론 도덕보다 효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문화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러나 정치에서 여전히 도덕이 중요 덕목인 우리 사회에서, 많은 도덕적 결격 사유에도 공천부터 하고 보는 정치 문화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공연장 테러 희생자가 139명으로 늘어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용의자들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 연관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사주설’을 견지했다.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연방 수사위원회’는 25일(현지시간)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테러 부상자 2명이 병원에서 숨져 사망자가 139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 수사위원장은 이날 테러 대책 회의에서 이번 테러가 면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바스마니 지방법원은 이날 테러 공격 혐의를 받는 부자지간 용의자 3명에 대해서도 공판 전 구금 결정을 내렸다. 전날 구속된 테러 용의자 4명은 법정에 출두했을 당시 고문을 받은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흔적이 발견됐지만, 이날 구속된 3명에게서는 부상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바스마니 지방법원은 전날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체포한 용의자 11명 중 달레르존 미르조예프(32), 사이다크라미 라차발리조다(30), 샴시딘 파리두니(25), 무하마드소비르 파이조프(19) 등 타지키스탄인 4명에 대해 공판이 열리는 오는 5월22일까지 구금 처분을 내렸다.
푸틴 대통령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테러를 일으켰다고 처음 인정하면서도 최종 배후에 우크라이나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테러 대책 회의에서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이념적 이유로 싸워온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도 미국 등 다른 나라는 ‘이슬람국가(IS) 추종자들에 의해 유혈 테러가 자행된 것’이라고 설득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테러를 누가 저질렀는지는 알게 됐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시켰는지도 알고 싶다며 테러리스트들이 왜 우크라이나로 도피하려고 했는지, 그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테러 사건으로) 누가 이익을 얻는가. 네오나치 우크라이나 정권의 손에 의해 우리와 전쟁을 벌여온 자들이 자행해온 시도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19일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를 전격 폐지, -0.1%였던 기준금리를 0~0.1%로 전환했다. 아울러 10년 국채 금리가 1.0% 수준을 상회하는 것을 제어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던 YCC(Yield Curve Control) 역시 철회하며 아베노믹스 이후 진행돼오던 초완화 정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상화의 첫걸음을 떼었다. 8년 만의 마이너스 금리 폐지이자, 2007년 2월 이후 처음으로 단행된 기준금리 인상이었던 만큼 일본은행이 느끼는 부담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은행에는 과거 통화 정책 정상화 실패라는 무게 역시 부담이었을 것이다. 버블 붕괴 이후 제로 금리를 유지하던 일본은행은 2000년 8월 경기 회복의 징후와 함께 물가 상승 시그널이 나타나자 전격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닷컴 버블 붕괴와 9·11테러 등으로 인해 진행된 경기 침체의 파고 속에서 수개월 내 제로 금리로 되돌려야 했다. 2007년 2월 금리 인상 이후 불과 1년 후에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쳐오면서 일본은행은 다시금 제로 금리를 유지하고 대규모 완화 정책으로도 부족, 언급되었던 마이너스 금리와 YCC까지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성급한 출구 전략의 실패’의 교과서가 되었던 것이다.
장기간 유지했던 완화 정책에서의 탈피, 과거의 긴축 실패 트라우마와 같은 부담이 있기에 일본은행은 다른 국가의 중앙은행들과는 달리 상당히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인해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가 목표치인 2.0%를 훌쩍 넘어서도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했다.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이 높은 만큼 크게 오른 에너지 가격을 보면서 금리를 성급하게 인상했을 때, 이후 에너지 가격 급락 등의 상황이 나타나게 되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오랜 기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던 일본 기업들의 임금 인상을 기다렸다. 임금은 다른 자산들과는 달리 하방경직성이 매우 강하기에 높은 임금 인상은 진성의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게 된다. 지난 3월15일 일본 기업들이 5%를 훌쩍 넘는 임금 인상을 발표한 이후 일본은행은 과감한 통화 정책 정상화의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경험한 일본은행은 이번엔 시장과의 철저한 사전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했다. 실제 19일 일본의 금리 인상 이전에도 수차례 일본 통화 정책 변경 가능성이 언론에서 보도되었고, 시장도 이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었다. 또한 19일 금리 인상을 하루 앞둔 18일 오전 시장의 예상을 깨고 장기 국채를 매입하면서 시장에 엔화를 공급했다. 금리 인상은 시중 공급된 과도한 엔화를 회수하는 것을 뜻한다. 엔화의 흡수 발표를 하루 앞두고 엔화를 공급하면서 시장의 예상을 뒤엎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첫 금리 인상 후 시장 참여자들은 꾸준한 금리 인상이 뒤따를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된다. 정책 변화를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은 빠른 엔화 강세와 빠른 시장 금리 상승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런 시장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자 엔화 공급을 늘리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금융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금리 인상 일변도로 꾸준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일본은행의 속도 조절이 나타날 수 있다면 일방적 엔화 강세 및 금리 상승에 대한 기대를 희석시킬 수 있다.
원·달러 환율의 방향성과 변동성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더욱 강해진 동상이몽
이런 맥락에서 금리 인상을 발표하면서도 일본은행은 과거에 이어오던 대규모 통화 완화 정책의 기조는 유지할 것임을 천명한다. 향후 점진적 금리 인상은 단행되겠지만, 시장의 반응이 과도하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제어하고자 언제든 유연하게 속도조절을 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힘입어 금리 인상 직전 빠른 속도로 강세를 보이던 엔화는 약세 전환되었고, 금리 역시 소폭 상승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일본은행의 조치로 당장은 금리 인상에도 불구, 금융시장의 충격은 제한적이었다. 다만 향후 이어질 추가 금리 인상 과정에서의 대응에 따른 변동성 확대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이후의 변화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